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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여섯 번째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9-13 00:00:00 조회 : 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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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루 쉬고 다시 이한열 장학생 글과 함께해보아요~ 여섯번 째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하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보아용~><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저는 사회학과 학생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동아대에서 학술동아리를 운영하며 회장을 3년간 지냈고 활동을 4년간 해오며 지금 사회의 문제점을 통감,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 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여성문제, 여성노동권 문제를 알리며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이거나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는 영상제와 오픈 세미나를 진행하며 장애와 인권에 대한 고민들을 학내에 풀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사회에서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학과구조조정에 대한 비판적 고민으로서 학내 민주주의를 위한 포럼을 진행하기도 하였고 5.18 광주와 관련된 사진전, 영상제, 실천단 사업을 진행해오며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도 이어나갔습니다. 지금까지 2009년 <노동불안정구역 R.O.K>, 2010년 <동아인, 동아대 민주주의 를 말하다 >, 2010년<6·2지방선거 맞이, ‘위기의 민주주의 어떻게 할 것인가’>, 2011년 < 성폭력/노동/경제위기 사회과학포럼>, 2011년 <반성폭력,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사람들>, 2011년 <대학생 대안 찾기, 핵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2011년 <부산지역 대안세계화 포럼 ‘경제위기와 빈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사태-한진 스머프들의 진짜 이야기> 등의 포럼을 기획, 총괄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을 학교 내 학우들과 함께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나갔습니다. 또한 2009년 5.18 광주 순례단 출정, 2009년 농민학생연대활동 씨앗, 2010년 노동절 맞이 동아대 공동행동, 2011년 빈곤 철폐 현장 활동, 2011년 대학생 대안 찾기 실천단, 2011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동아대 실천단 Rise Up, 2012년 Mayday 동아대희망행동, 2012년 5.18 반딧불 광주 순례단 등 현장 활동에서 단장, 기획 등의 역할을 맡으며 직접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또한 용산참사해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사태 해결, FTA 반대, 쌍용차사태 해결 등을 위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희망버스와 관련된 사업에도 참여하며 2011년 반신자유주의 희망선봉대 전국 대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사회모순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며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비판 세미나, 자본주의 역사학습 등 대학생으로서 비판적 지성을 쌓기 위한 학습모임을 꾸준히 만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민주주의, 노동, 여성, 장애, 빈곤, 인권 등 중요 사회문제를 고민하며 학내, 학외에서 학우들,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활동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번 방학 중에는 FTA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농촌활동을 준비하고 있고 부산지역을 총괄하는 대안적 학술 모임을 추진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일찍 이혼을 하셔서 한 부모 가정의 셋째로 살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10년 넘게 비정규직으로 식당일을 해오셨고 오빠들은 모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IMF 이후 사업부도로 생긴 가계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학자금대출을 갚지 못해 아직 개인 빚을 갚고 있고, 작은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가계부채를 갚고 있으며 저는 대학교 4년까지 전액 학자금대출을 받고 생활비 대출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활동과 함께 학업도 게을리 하지 않아 3학기 동안 일정정도의 장학금을 받았고, 학년 1등을 놓치지 않아 3학기 동안은 전액장학금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학금도 생활비에 보태드리고 생활비대출을 늘 받다보니 학자금대출 빚이 많이 쌓이게 되었고 상환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인적인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회적 활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한열 열사 장학회를 알게 되어, 4학년임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이와 같이 장학생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발표,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등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이후 12.12 쿠데타를 통해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전두환은 간선제를 통해 7년간 대통령을 역임하게 됩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속에서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점차 거세졌고 이는 직선제 요구로 이어졌으나 전두환 정권은 이를 강력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박종철 열사는 민주투사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나 독재정권의 잔혹한 물고문에 의해 산화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독재정권은 조사 도중 책상을 ‘탁’ 쳤더니 심장마비로 ‘억’하고 쓰러졌다며 기만적인 거짓말로 사건을 둘러대었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의문사가 있었고 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부르짖던 많은 사람들이 정권의 폭력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박종철 열사는 끝까지 선배활동가에 대한 소재를 언급하지 않으셨고 결국 물고문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지만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면서 박종철 열사의 민주화를 향한 뜻은 꺾이지 않고 민중들에 의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대통령을 물려주기 위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려 하고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며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 민중적인 분노가 쌓이게 되고 이후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조치 이후 4.13 호헌조치 철회, 직선제 개헌 쟁취를 향한 시위와 궐기대회가 이어졌고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러던 중,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벌어진 시위 속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이후 이어진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은 많은 이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민주화와 인간해방에 대한 염원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던 분이었기에 민주국민장을 통해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히게 되었고 열사정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들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고 6월 항쟁이 촉발되게 되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은 전국적인 규모로 벌어진 직선제, 민주화를 향한 전민중적 저항운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게 되고 당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는 6.29선언을 발표, 결국 민중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독재타도와 호헌 철폐, 민주화쟁취를 위한 6월 항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직선제를 이뤄낼 수 있었고 현재에도 직접선거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6월 항쟁 정신은 87년 7, 8, 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그 시대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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