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생 일곱번 째 글이에요~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1) 사회적 약자 신상 보호 상 제외합니다. 2) 깨어있는 시민 학교 문턱도 제대로 밟지 못했던 저희 할머니, 지도를 보면서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어린 소년은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꿈을 꾸면서 삶을 더욱 풍부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현대 대부분의 국가의 보편적 정치이념이며, 미래에도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힘을 효과적이고 이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 삶을 통해 실천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렇게 이한열장학생에 지원할 수 있기까지 제 삶을 이끈 것은 나눔에 대한 갈망과, 옳은 일은 일단 몸으로 옮기고 보는 열정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라나기 위해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 채울 것이고 뛰어난 자질은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 이라 했습니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한열 열사처럼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저만의 길을 닦기 위해 걷고 또 걸어 나갈 것입니다. 이 희망을 실현할 기회를 이한열장학회에서 찾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2)-1활동내용 (1)에너지시민연대 에너지의 날 행사 자원봉사 (2)아산나눔재단 NPO아카데미 수료 (3)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개발협력수기 공모 우수상 (4)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청소년을 위한 기사작성 봉사 (5)인권실천시민연대 대학생인권학교 수료 (6)통일교육협의회 대학생통일캠프 수료 (7)YMCA대학생해외봉사단 라온아띠 1기 (8)수협 사랑해어촌봉사단 (9)아이들과미래 봉사 아이디어 공모 최우수상 (10)자연보호중앙연맹 자연보호활동수기 입선 (11)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필리핀 두마게떼 해외봉사 (12)해피무브 청년봉사단 3기 (13)호주 CVA환경보호활동 (14)국제환경실천연합회 환경보호활동공모 동상 (15)前청년당원 (16)청년유니온조합원(2011.6~) 3)사회적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 저는 현재 SGS사회적기업가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예비사회적기업 인문학家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주민에게 무료로 한국어 교육을 하는 꿈꾸는한글방의 카페지기, 소아암 어린이를 돕는 쌀화환 사회적기업 ‘곰이사는마을’의 Social Network 팀장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Social Creator 청연이 되는 그날까지, 나눔의 가치를 세우고 이를 홍보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고 싶습니다. 3-1. 인문학家는? 1)비전과 미션 ㉠비전: 국내 최고의 인문학 사교육 기업 ㉡미션: 인문학을 통해 현대인이 사회와 소통하도록 만든다. 2)지역사회 문제 파악 ㉠문제: 소외 계층일수록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부족 ㉡사례: ➀지역아동센터의 교육은 주로 입시 위주 과목으로 국한되고 형식적 ➁사교육 시장에서 주목받는 독서나 논술 교육은 저소득층에게는 사치로 여겨지며 소외 계층일수록 독서량이 현저히 낮다는 통계-국민 독서 실태조사. ㉢원인: 인문학의 위기-인문학이 시간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교양적 차원으로 인식되면서 입시 및 취업 위주 교육만이 성행 (인문학 연구비 지원 감소 및 인문학 관련 전공이 폐과 1순위, 인문학 전공자 취업률 53.4%로 공학, 자연, 사회 전공 뒤를 이어 최하위임-한국 학술 진흥재단) 3)회사 소개-지역 사회 기반 서비스 창출 형 사회적기업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 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한열이 형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돌아왔습니다. 형은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지요? 대학은 기말고사 기간이라 저를 비롯한 형의 후배들은 다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대학의 6월은 그런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뜨거운 외침과, 처절하지만 숭고했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편하게 공부를 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는 곧 잘 잊고 삽니다.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심도 없고요. 하지만 그래서 더 형의 희생이 사무지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실상 권위주의 정권으로 회향하는 한국의 정치 실태를 바라볼 때는 말이지요.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수도 없지만 형이 보고 싶은 것은, 형처럼 치열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제 이타심과 진정성의 부족함 때문일까요? 중학생 때, 한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고(故) 이한열 열사’라는 이름으로 형을 처음 만났지요. 군사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위해 시위에 나섰다가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열사’이고, ‘투사’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 형은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람 좋아 보이는 그런 동네 형이었어요.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달리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형은, 어리광쟁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말썽 한번 피우지 않는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아들이었지요. 동생 훈열이 던진 공에 얼굴이 찢어져도 동생 걱정에 아프다는 소리도 한 마디 안 했던 속 깊은 형이고, 큰 누나에게 ‘선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동생이었습니다. 형의 동기와 선후배들은 지금도 형은 투사가 아니며, 살아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 날 다큐를 보며 휘몰아치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섰던 선배들의 서러움과 고달픔이 느껴져 몇 번이나 가슴으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형이 다녔던 광주 진흥고등학교는, 제가 다녔던 비아남초등학교의 바로 옆에 있는 학교였어요. 그 시절 형은 선배들과의 친선을 경험하며 여명회 활동을 하고, 1학년 때는 학급실장,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한 모범생이었지요. 저 역시 학급실장, 학생회장의 경험이 있어서 형의 삶에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아요. 이성교제 한번 해보지 못 하고, 병아리 색 원피스를 입었던 그녀에게 결국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한 형이었지만, 뜨겁고 열정적인 형의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음에도 집 안에서 책을 읽으며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대학교에 들어와 알게 돼서일까요? 형의 뜨거운 열정은 대학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인 삶, 개인과 조직, 이상과 현실, 역사에 대해 끊임없는 치열한 고민이 바탕이 된 현실타파의 삶을 살길 바랐던 진짜 ‘청춘’이었던 것이지요. 경영학회와 만화사랑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길 즐겼지요. 축제 때는 경영학회 민속장터에서 수익금 전액을 올림픽을 앞두고 철거를 당해 천막농성 중인 상계동 등의 꽃동네 철거민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은 과격한 투쟁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형은 “집회와 시위에 동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에게 다가가고 공감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며 “수백 마디의 구호보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이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해요. 형의 그 말에 친구는 낭만을 버리지 못 했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저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좋아하고 시를 쓰는 그런 형이 참 좋습니다. 사실 저도 자칭 문학청년이거든요. 하하. “운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도 “운동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던 형은 경영학과 2학년 총회 준비 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1987년 6월 9일 ‘6 ․ 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나갔다가 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말았습니다. 27일 동안 의식불명이던 형은 결국 7월 5일 새벽에 영영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지요. 형! 지금은 모두의 권리가 인정되고 평화로운 곳에서 잘 지내고 있지요? 형이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서울은 형이 꿈꾸던 세상이 맞나요? 형이 자주 찾던 신촌시장 골목 보은집은 시장이 사라져 이제 다시 갈 수 없지만, 형과 함께 감자탕에 소주 한잔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형과는 처음보고서도 분명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6월이에요 형.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은 찾아왔고, 남은 사람들은 형을 그리워하며 다시 광장에 모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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