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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여덟 번째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9-18 00:00:00 조회 : 3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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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 째 장학생 글이에요! 글을 정말 잘쓰네요ㅠ 매우 멋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시어 잦은 실패가 있어 부득이하게 이사를 여러 번 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 중, 고 시절 전학을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 년 전학을 다니다시피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낯설게 저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려는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과 쉽게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길렀습니다. 그럼에도 전학을 자주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제게 늘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청소년기에는 아버지의 사업도 잘 되어 안정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나 대학에 와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2008년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여전히 그러한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재기의 꿈을 가지시며 동분서주 하고 계시고 어머니도 차림사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시지만 좀처럼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저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서 부모님도 빚을 내셔야 하기에 제 이름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고 이번 학기로 5학기가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늘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번에는 아르바이트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학교도 안정적으로 다니기 위해 신촌에서 하숙을 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번 돈으로 하숙비와 기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 이름으로 진 빚이 약 2000만원인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오히려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서 마음은 편합니다. 한편 교사인 언니는 2011년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있습니다. 동생도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 대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다섯 살, 아래로는 여덟 살의 차이가 나는 세 자매인지라 부모님께서는 30년 내내 대입을 위한 뒷바라지를 하시고 계십니다. 오히려 자녀의 대학 진학이 부모님에게 막연하고 부푼 기대가 되고 있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발 자국만 떨어져 보면 장학금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가계 소득의 60%가 자녀 교육비로 들어가는 한 가정인 저희 집과 제 스스로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연구하는, 그 중에서도 정부와 의회와 시민사회의 상호작용과 이를 제도화하는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도를 만들기까지 위한 여러 정치 행위자들의 힘에 주목합니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착취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약한 자의 이익이 증진되는 것이 지금 사회의 공공이라고 여기며 실천하고자 합니다. 이에 학내에서 했던 다양한 활동은 공동체 활동이었습니다. 학생회를 통해 공동체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며 교육투쟁을 이끌어가기도 했습니다. 여러 정치 과정을 경험하면서 대의제의 한계와 직접 투쟁의 긍정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2011년 학교의 비민주적인 사회과학대학 신입생 이전을 저지하는 투쟁을 하면서 민주주의는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 이한열 열사가 부르짖던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새롭게 퍼지고 있습니다. 당시 그토록 염원했던 호헌철폐, 대통령 직선제는 이뤄졌지만 이제는 더 많은, 더 깊은 민주주의를 곳곳에서 이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학생회를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여성주의는 지금까지도 제게 삶의 힘이자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여성주의가 공동체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규범적으로 나눠진 모든 위계관계를 해체시키고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맺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우리 삶의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행정학과 부학생회장 시절, 친구들과 많은 토론을 해서 행정학과 자치규약을 만들어 반성폭력은 물론 일상적으로 여성주의를 실현시키려했습니다. 가깝게는 언니, 누나, 오빠, 형 등의 호칭을 떼고 서로가 정한 별칭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힘겨워하고 굳이 필요하냐는 문제제기도 많았지만 후에 친구들이 훨씬 더 평등한 관계맺음을 하고 있음을 서로가 느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또한 작년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 시절, 학교는 갑작스레 사회과학대학 신입생 송도 국제 캠퍼스 이전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실천단을 꾸려 여러 차례의 학생 간담회, 교수 ․ 학생 간담회 등을 진행했고 후에 학생총회를 성사했습니다. 360여명이 연희관을 가득 메워 송도 국제 캠퍼스 이전을 막아내고 후에 본관으로가 총장님 면담을 진행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과 함께하고자 한 노력들은 학생들의 마음을 한 데 모았고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나아가 대학의 사회적인 역할, 기업화까지 담론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 교육투쟁은 학교에게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의사결정의 효율성보다는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가치를 합의해나감을 사회과학대학 학생들이 직접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학내에서의 활동에서 지금의 제도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직접 느끼고 활동하면서 민주주의가 보다 더 깊게 실현되어야 함을 느낀 한편, 정부의 한계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포이동 인연공부방에서 2009년, 2010년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마을에 화재가 났을 때 마을에서 생활하며 두 달 간 용역이 집을 부수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보며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포이동 인연공부방은 타워팰리스 앞 판자촌으로도 유명한 포이동 266번지에 마을 안에 있습니다. 정부의 강제이주로 이곳에 삶을 일군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투쟁하고 있습니다. 포이동 인연공부방은 2005년 마을 문제에 관심있던 대학생들의 힘으로 개교하게 되고 이제 어느덧 중견 공부방이 되었습니다. 포이동은 정부가 빈민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시개발의 명목으로 내쫓는 것은 정부가 사람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부의 인정과 전향적인 정책없이 포이동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으로 보입니다. 공부방 교사로 활동하면서 ‘어떤 교육을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해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녀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과 같이 주요 과목은 이미 격차가 벌려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포이동 공부방 교사들의 수업은 격차를 메워주는 것이어야 하는가, 아님 대안교육처럼 다른 것들을 시도해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무한경쟁시대에 아이들을 편입시킬 것인가’와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할 거라면, 아이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여러 다른 이유로 구조에서 이탈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의 길항작용으로 한편 후자는 대안교육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근 1년은 이런 고민들로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이 책, 저 책 찾아봤지만 구조에서 낙오되는 것을 눈뜨고 볼 수는 없었기에 학교 학과 공부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달리 없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교육에 대한 상상이 부족한 탓이 컸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있어 교사, 학생의 위계관계가 아닌 평등할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을 낙인찍고 배제시키는 사회의 수많은 기준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저에게 있어 포이동 공부방은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하러 가는 교육 ‘봉사’가 아니라 서로 배우고 반성하고 좀 더 그 삶에 가까이 다가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지금도 저에겐 포이동은 가슴 아련한 공간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포이동을 낭만화하는 기억이 아니라 마을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고 아이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빚입니다. 지금 이렇듯 주변으로만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삶들이 보다 평등하해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행정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양극화 현상을 뚜렷해졌고 그렇기에 더욱 공공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많은 제도가 투쟁의 산물이듯이 비가시화된 영역을 들춰내고 정책으로 입안하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로 정책을 개발하는 것보다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재정 및 전달체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에 앞으로 연구하고 싶고 활동하고 싶은 분야는 정부예산과 재무행정입니다. 정부예산은 재정의 정치적인 과정에 주목합니다. 정부와 의회와의 관계에 있어 재정은 합리성에 의존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과정이고 행정학 역시 정치와 분리되어있다는 미신을 타파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매년 12월 31일이 되어서야 극적으로 정부 예산안이 합의됩니다. 그러고 나서 추가경정예산은 현재의 우선순위보다 여야의 정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단순히 옳다, 그르다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더욱 관심갖고 연구하고 싶습니다. 재무행정은 정부의 재정의 관리 기법에 대해 주목합니다. 여러 정치과정을 거친 뒤에 최종으로 확정된 정부 예산안은 결국 해당 정부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선순위에 근거해 어디에 돈을 많이 쓰는지가 나온 정부 예산안은 가장 정부가 제1의 해결 과제로 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 되는데 의도와 내용이 좋은 정책이라도 실제 시민, 주민들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비단 외부효과를 간과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체계가 왜곡되어있을 수 있기에 이를 재정적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선 청년유니온 서울 지부 대의원에 출마했고 당선이 된다면 청년들의 노동운동에서 활동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학교에서 사회과학대학 농주체와 자치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졸업 전까지는 비정상적인 고등록금을 꼭 해결하고 싶습니다. 보다 많은 친구들과 민주주의의 깊이, 넓이를 고민하며 새로운 이한열 열사들을 만나는 생각에 늘 설렙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이한열 열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2.12 사태부터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공포스러운 대한민국에 희망의 태동할 것이라 믿었던 많은 시민들의 염원을 무참히 짓밟은 12.12 사태는 추악스러운 역사입니다. 전두환 정권 이후 더욱 더 세련된 억압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질기고 진 전두환 정권을 끝낸 것은 1987년 그 해 초여름이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투쟁은 이한열 열사로 불이 붙었고 7월 노동자 대투쟁까지, 한국 사회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보다 완성되게 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그 중심에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거리의 민주주의가 제도의 민주주의로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광주의 5월도 크게 관심 없던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나서 우리 사회의 비민주성에 크게 분노해 스물 두 살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출정식에서 최루탄을 맞게 됩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를 마음 속에 새기며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실천에 옮기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이한열 열사 같던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머뭇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한열 열사의 행동은, 그리고 죽음은 우리 스스로르 성찰케 했습니다. 이에 열사정신 계승이라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보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감동적인 것은 이한열 열사보다 그의 어머니이신 배은심 여사이십니다. 제가 처음 이한열 열사 추모제에 갔던 2008년, 그의 21주기에서 배은심 여사의 목소리는 제 심장에 꽂혔습니다. 한열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서, 한열이를 위해서 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절절함과 분노, 그리고 청년들에 대한 당부는 지금 저에게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매 해 추모제에서 뵙는 배은심 여사는 제가 감히 어머니라고도 부르실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이한열 열사만큼이나 열사로 살아가시는 배은심 여사는 제게 열사를 만나는 한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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