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일주일을 이한열 장학생 글과 함께해보아요~ 아홉 번째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하였습니다! 단락 구분을 해서 여러분이 읽기 편하게 업로드했습니다^^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저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OOO입니다. 제가 더 따뜻하고 두루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데에는 ‘시원’하게 베풀며 살라는 뜻의 이름 덕도 있겠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모두 가난 때문에 중학교 밖에 못 가셨습니다. 학력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얻으시기 어려웠습니다. 장사를 비롯해 정말 많은 일을 해보셨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택배 일을 하시는 특수고용 노동자이시고, 어머니께서는 할인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십니다. 두 분 모두 건강이 안 좋지만 생활비도 많이 들고 노후대책도 없기 때문에 일을 놓긴 어렵습니다. 때론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분노하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돈이 많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부족하진 않았더라면’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기마다 장학금을 받으러 온갖 서류를 떼고 면접을 보면서 지친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하다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된 것들, 어려운 형편이나 그 무엇도 모두 제 삶의 ‘전제’라는 점입니다. 전제는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 때문에 좌절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으며, 수많은 전제들 속에서 경험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임을 느꼈습니다. 부당한 전제 때문에 겪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되, 주체적으로 내 삶을 꾸려가면서, 그런 고통들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깨나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누구나 평등한 전제 아래에서 태어나고 주체적 삶을 사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제 형편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제가 가난을 겪어보았기에 사회적 약자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끊임없는 고생을 보았기에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사회겠지만, 아직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놓인 현실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가 깨달은 바를 분명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처음처럼’이라는 책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만물을 이롭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신을 두고, 다투지 않음’을 드셨습니다. 평소에는 겸손하고도 온화하게 흘러 어려운 이와 함께 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하고 냉정하게 몰아침으로써 세상의 어려움을 씻어내고 싶습니다. 물이 그렇듯, 평소에는 잘 티가 안 나더라도 실제로는 여러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에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우선 학생의 본분으로서 수업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든 기본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학 수업은 인간에 대한 희망과 겸허한 태도를 가르쳐 줬습니다. 또한 사회정책적 대안들을 고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강의실 안 수업에만 머물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2010년까지는 민중가요 노래패에서 뜻있고 진실한 음악을 추구했습니다. 2011년부터는 학생회를 하면서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느끼고,또 알렸습니다. 여러 활동들 가운데에서도, ‘민달팽이 유니온’이라는 이름으로 청년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기획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초대위원장이 된 덕분에 서울시장님도 자주 뵙고, 여러 언론을 통해 사회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주거’의 영역이 ‘매매’와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면서 사람들의 생존권은 물론 다양한 가능성이 제약받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였습니다. 이 활동으로 말미암아 저는 도시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도시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들이 집약된 서울시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받고 서로 신뢰가 깊어서 안정된, 그러면서도 누구나 기회의 제약 없이 꿈을 펼 수 있어서 역동적인 공동체’를 평생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2008년 봄까지만 해도 제게 이한열 열사는 그저 훌륭한 선배였고, 6월 항쟁은 유명한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교과서 속 어렴풋한 기억 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 6월은 제 인식의 전환점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저는 당시 새내기로서 민중가요 노래패 ‘늘푸른소리’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열사 추모제 공연을 준비하면서 민중가요 뿐 만 아니라 그 배경을 공부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87년에 전국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배웠습니다. 불과 제가 태어날 무렵 민중의 삶이 그토록 유린당하고, 또 민중이 떨쳐 일어났다는 것, 무엇 하나 온전히 믿기 힘든 역사였습니다. ‘시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민주주의 명제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간 관성적으로 민주주의를 대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모순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싸웠는데도 여전히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음도 알았습니다. 2008년 6월 9일, 추모제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열사를 추모하고 1987년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6월 항쟁을 기념하고 이 시대의 투쟁을 하기위해 무려 100만 명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습니다. 당시를 떠올리면 참으로 아득해집니다. 어지러운 시절에 다들 바쁜 삶을 살 텐데도 그렇게나 많이 모였습니다. 6월 항쟁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시민들은 새로운 역사를 스스로 써내려가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고 잘 모르긴 해도, 세상을 바꿔가기 위해 평생 헌신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였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qnRMfja이 없어야 한다’던 열사의 뜻을 가슴 깊이 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늘푸른소리에서 온 힘을 다해 활동했고, 이듬해 늘푸른소리 회장, 사회과학대학 동아리 연합회장을 맡았습니다. 민중가요를 통해 사람들에게 강등과 자극을 주고 싶었으며, 제가 동아리에서 가진 경험을 다른 학우들에게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매년 이한열 열사 추모제에서는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아리를 하는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더 많은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졌습니다. 작년에는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맡아 총학생회 살림을 책임졌고, 추모제에서는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올해에는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만나왔으며, 추모제에서 추모곡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소개했습니다. 학생회를 해오면서 학생사회를 대표해서 등록금, 주거문제 등을 해결하고 진보적인 담론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학내 대학평의원회 설립’이라는 의제로 투쟁을 해왔습니다. 대학평의원회에는 ‘공동체 내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이 표출되고 결국 조화를 이룰 때에 최선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민주주의 철학과, 대학교육의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사학재단이 공공성을 갖춰야 한다‘는 교육 공공성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이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새삼 아로새기고, 학생들이 놓인 어려운 현실에 꼭 필요한 변화들을 만들어 가려합니다. 여기에 더해, 대선을 맞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비례대표제 확대) 운동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어느새 대학생활에서의 다섯 번째 6월입니다. 머지않아 졸업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지난 생활을 돌아보게 됩니다. 6월은 언제나 한 해의 가운데에서 지난 반년을 매섭게 성찰하는 시기였습니다. 항상 이때쯤이면 쉼 없이 달려오느라 몸과 마음이 지치곤 했지만, 이한열 동산에 올라 투정도 부리고, 다짐도 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열사의 인간적이고 솔직한 고민을 떠올리고, 고민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행동들을 되새겼습니다. 이한열 열사를 본 적이 없어도 마치 친한 선배처럼 편했습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서 다시 남은 반년을 보내왔습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1987년 6월’도 그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구시대의 모순을 인식하고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를 그리는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6월로는 부족합니다. 매년 우리 시대의 새로운 6월을 맞이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한열 열사와 6월 항쟁을 달력에, 교과서에, 신문기사에, 망월동에, 기념관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에 필요한 새로운 민주주의와 새로운 사회를 그려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열사 정신의 올바른 구현이고, 6월 항쟁의 성과를 바로 세워 간직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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