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씀 드렸던 최병수 작가님의 자모 솟대 전이 불과 열흘 남았습니다. 예쁜 엽서들도 제작되었답니다. 기념관에 오시면 받아보실 수 있으니 많이 들러주세요! 오프닝 무대에는 특별 게스트 임정현씨가 오셔 공연도 해주신다고 합니다. ^^
최병수의 솟대 / 김진송
솟대와 장승은 무수히 생산된다. 예전이 아니다. 오늘 그렇다. 명품마을을 내건 시골동네의 줄줄이 세워진 간판 옆에는 여지없이 장승이 박히고 솟대가 걸린다. 전통을 내건 카페나 음식점 혹은 지방의 문화행사에 등장하는 솟대와 장승은 오늘날 가장 일상적인 문화적인 아이콘이다. 그 무수히 복제되는 형상과 상투적으로 소모되는 의미의 장승과 솟대는 지겹다. 최병수 역시 솟대를 만든다. 오래전부터이다. 그가 처음 솟대를 제대로 세운 것은 새만금 갯벌이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죽어가는 갯벌에 대한 분노이다. 그러나 최병수의 솟대는 새가 올라앉아 있지 않다. 솟대에 매달린 새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바람을 하늘에 전달하기 위한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새를 만들어 날리지 않는 까닭이다. 대신 그의 장대 끝에는 게와 짱뚱어, 어선과 갯지렁이가 매달린다. 갯벌에 사는 생명들이다. 그의 장대 끝에 매달린 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을 다시 인간에게 일러바치는 동물들은 그렇게 스스로 장대 끝에 올라앉는다. 최병수의 솟대가 다른 솟대와 다른 이유이다. 그의 작업실로 가는 백야도의 바닷가에 갈치가 느닷없이 솟아 있는 까닭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연을 훼손하는 인간의 언어를 자연의 언어로 바꿔놓는다. 자연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그게 오랫동안 환경운동을 해온 최병수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장대에 글자를 매달아 들고 왔다. 한글을 풀어 헤친 자음과 모음들이 그의 장대 끝에 매달려 있다. 이야기의 당사자를 직접 눈앞에 들이대며 스스로 말하게 하는 최병수의 어법에서 보자면 그의 문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 언어는 글자 그대로의 말이다. 그의 장대 끝에 매달린 문자들은 어쩌면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언어들일지도 모른다. 말들은, 언어들은 그리고 문자들은 사람들에 섞여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왜곡되고 뒤틀린다. 어느새 뜻은 모호해지고 의미는 뒤바뀐다. 그런 언어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그는 그런 말 하나를 집어 솟대에 올린다. 자음을 붙들어 매고 모음을 엮어낸다. 솟대에는 하나의 글자가 매달린다. 글자는 솟대가 박힌 바로 그 자리의 언어로 되살아난다. 그것은 바람의 말일 수 있으며 파도의 소리일 수 있으며 하늘의 빛일 수 있다. 그 순간 뒤틀리고 왜곡된 말은 스스로의 문자로 되돌아간다. 다른 일체의 변용된 의미가 아니라 맨 처음 그 글자가 지녔던 바로 그 의미, 그 글자가 스스로 말하는 의미로 되돌아간다. 시가 그렇고 사랑이 그러하며 꿈이 그러하고 해와 달이 그러하다.
그가 글자에 눈을 돌린 까닭은 새삼 한글이나 문자가 주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깃발이 그렇듯이 그리고 솟대가 그렇듯이 하늘 위로 뭔가를 내거는 일은 간절한 기원이기도 하고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문자들은 갯지렁이가 들려주는 하소연과 다르지 않다. 문명을 앞세워 자연을 훼손하는 인간들에게 짱뚱어가 그렇게 말하듯이 이런 저런 이유를 앞세워 언어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주는 살아있는 문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최병수가 시(詩)를 장대에 매단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시는 시일뿐이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