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단결과 투쟁의 이름이여
최루탄 자욱한 교문이 눈에 선하다. 하얀 최루가스 속에서 기침을 하며 빠져나오던 학우
들, 구호와 노래소리, 스크럼은 짠 채 드러누웠던 도로의 감촉, 수십만명의 행진 대열.
이한열 열사는 우리들을 단결시켰다. 자신 내부의 비겁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
었고,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
게 해 주었다. 낮에는 거리에 나가 싸우고 밤이 되면 학교로 돌아와 병실을 지키면서, 우리
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에게 몇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의학지식이 없는 우리가 열사를
살리는 길은, 오직 그가 원하던 바를 이루어놓는 것밖에는 없다. 한열아! 똑똑이 보아다오.
내일 명동에서, 종로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워나가는가를.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지금, 열사와 약속한 것 중에 지켜지지 않은 것이 또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 미국놈들의 지배사슬은 끊임없이 한반도를 조여대고, 독재자의 폭압은 더욱 교
묘해지고 있다. 통일운동에 나선 애국자들은 온갖 인간적 매도까지 당하면서 감옥으로 끌려
가고 있으며,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조직을 파괴하려는 책동은 끊일 새가 없다. 6월항쟁으
로 쟁취한 성과물은 도대체 어디에 남아 있는가?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이한열 열사가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속의 그 사람, 한때는 유명했지만 이제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름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한열, 그는 과연 과거의 추억만으로 족한 인물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한열은 무기력과 무관심을 일깨운 이름이다. 비겁과 허약함을 깨부
순 이름이며, 단결과 투쟁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무기력, 무관심, 기만과 허위, 비
겁과 허약함, 분열이 판치고 있는 곳에 반드시 부활하는 그런 이름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이다.
6월 10일 총궐기를 앞두고 의식을 잃으면서 열사가 남긴 말은 “내일 시청에 가야 할텐
데……”였다. 그는 그로부터 한달 후인 7월 9일, 시신의 몸으로 시청에 도착 했다. 많은 사람
이 그 주변에서 울었다. 최루탄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던 열사의 시 때문에 울었고, 한이를
살려내라던 어머님의 절규에 울었다. 열사를 살해한 독재정권에 저주를 퍼부어대면서 울었
다.
슬픔과 분노는 우리들의 무기이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한에서만 무기가
될 수 있다. 한바탕 울고나면 속이 후련해져서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무기가 될 수 없다.
한바탕 때려부수고나니 속이 좀 풀린다면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성질이 좀 난 것’일 게다.
그것 역시 무기가 될 수 없다. 수많은 애국자들의 살해 현장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될 것은
입술 지그시 악문 결의여야겠다. 돌아가신지 2,3년만에 잊혀질 슬픔과 분노라면 그 어떤 실
천적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열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열사와 약속한지 2년, 이제 또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그 약속을 수행할 수 있을는지 가슴
이 답답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치밀어오른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에 이한열 열사
가 새겨져 있고, 우리들 앞에 실천해야할 역사적 과제가 있는 한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87년 6월,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곳을 지나 시청으로 행진했듯이 가슴을 펴고 의연하게 걸
어나가자. 쓰러지고 넘어지다보면 어느날 우리는 그 곳에 도착해서, 환히 웃고 있는 열사와
만날 것이다.
아아, 그날이 보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1989년 11월 10일
우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