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10시~17시
02) 325-7216
후원계좌(신한)
100-028-371614
(사)이한열기념
사업회
전시소개 |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 되는 그날, 장애인과 더불어 참자유· 평등·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날, 작은 민들레로 태어나고 싶다. -손석용-
착했던 장남 석용이 1991년 뜨거웠던 봄이 지나갔다.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타살 이후 5월 한달 동안 11명의 청년, 학생, 노동자가 “민주정부 수립”,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산화해 가셨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해 8월 대구대학교 야간강좌 건물에서 또 한 청년이 스스로 8월 하늘의 별이 되었다. 손석용은 1970년 6월 26일 경북 영덕군 강구읍에서 태어났다. 수협에 근무하시는 아버지와 할머니는 영덕 본가에 사셨고 손석용은 어머니와 형, 여동생과 함께 초등학교 때부터 대구로 전학 와서 살았다. 속 썩이는 일 없이 늘 모범생이었던 손석용은 정 많고 속 깊은 아들이었다. “착한 거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한 가지를 판다고 하면 딱 부러지게 그것만 파는 고집이 있었다.” 아버지와는 떨어져 살았고, 늘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는 효자 아들이었다고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따뜻한 마음은 특수교육과로 1989년 3월, 평소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달랐던 손석용은 대구대학교 초등특수교육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특유의 감수성과 문학적 정열을 바탕으로 많은 문화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뿌리’ 라는 글패에서 김남주와 김지하를 읽으며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억압받는 자가 당당한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문학적 갈망을 표현하며 시를 수십 편 썼다. 또한 ‘우리마당’ 이라는 탈패활동을 통해 민중의 애환과 숨결이 담긴 춤, 풍물, 역사, 철학에 대한 교양을 쌓았고, 사범대 동아리 ‘해방터’를 창립하고 활동을 하였다. 특히, 학과에서는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운동을 고민하였고, 90년에는 전국 특수교육과 학생연합회 실무위원으로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매도되고 소외당하는 장애인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착취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여 투쟁하였고, 특수교육 선생님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소양을 키워갔다.
5월 투쟁과 손석용 1991년 3월 손석용은 육군에 입대한다. 군대에서 뜨거웠던 5월 투쟁을 지켜보며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분을 삼켰을 것이다. 8월 14일 청원 휴가를 나와 20일 귀대 예정이었던 손석용은 많은 이의 희생과 투쟁에도 풀리지 않는 정국을 뒤로한 채 자대로 복귀해야 하는 현실을 답답해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은 이미 최후의 선택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8일 아침,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친구와 함께 있었으며 친구 아버지 생신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했다. 친구와 헤어진 후 친형의 자취방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부모님 앞으로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에 들어왔다. 분신하기 전 친구들에게도 자필 유서를 남겼다.
양키 용병을 거부하며 장렬하게 죽어갔던 어느 선배 열사의 다짐이 나를 부끄럽게 했으며, 양키 용병에 응했던 나 자신이 미웠습니다. 더 이상 민족과 겨레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기에 이 길을 택합니다.
정권과 언론의 왜곡과 조작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분신 직후 학생들과 학교 경비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즉시 동산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다음날 새벽 5시 25분경에 “민족해방, 조국통일”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나, 들이닥친 전경들에 의해 열사의 유해는 탈취당하여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후 지속적인 규탄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군 당국은 열사가 군인 신분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강제 부검을 자행하였다. 열사의 죽음이 불러올 파장을 두려워한 정부 당국은 안기부, 기무사를 동원해 언론에 보도지침을 내려 열사의 죽음을 왜곡하기에 이른다. 지역의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은 비굴하게도 분신의 배후가 있는 것처럼 늦게 발견된 유서를 문제 삼아 제2의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유서가 자필임을 인정하자, 언론 보도를 통제하며 슬그머니 열사의 죽음을 축소, 은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이 분신대책위를 중심으로 한 학우들의 투쟁이 열사의 죽음에 대한 왜곡과 조작을 막을 수 있었다. 열사의 유해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낙동강 비산나루터에 뿌려졌고, 2001년 열사가 분신한 대구대학교 대명동캠퍼스 야간강좌 건물 앞에 흉상을 건립하고 매년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2002년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2014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저자 : 손석용열사추모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