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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회
전시소개 |
정상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아버지 승리의 그날까지 도와주십시오"
생활신조는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정상순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초암산 아래에 있다. 아버지는 늘 자녀들에게 "남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고, 4남매가 함께 티 없이 자란 좋은 가정이었다. 스스로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생활신조를 만들고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독서를 좋아해 묵묵히 한 권의 책을 다 읽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맡은 일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끝내고야 마는 책임감을 가졌다. 대인관계에서도 모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누구와도 다툼이나 언쟁을 하는 걸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이런 열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중학교시절
순천공고 시절 기네스북에 오르는 꿈 품어 1982년 순천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입학한 그는 1985년 졸업하기까지 학생으로서 멋진 꿈을 갖고 살았다. 실습 비중이 큰 공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진학 목표를 세우고 대학 입시 준비에도 매진하였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귀가하는 중에 불의의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학교는 그의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해 광양제철 측량 기사로 추천하였다. 첫 노동자 생활이었다. 이때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급여 전부를 저금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맡기는 성실함이 있었다. 직장생활 틈틈이 공부해 토목기사 국가기술자격, 토목재료시험 기술사 2급 국가기술자격을 따는 등 미래에 대한 준비도 착실히 해나갔다.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소감들을 남긴 수첩
제대 후 사업하면서 농민회와 사회단체 적극 후원 1986년 들떴던 아시안 게임이 끝난 10월에 국군에 입대해 경기도 남양주에서 군생활을 하고 1989년 봄에 제대했다. 군대 시절은 나약한 삶을 한 단계 더 굳건하게 했으며, 자신감을 갖게 했다. 마음은 성숙해져 세상을 보는 눈도 가질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청문회의 실망스런 모습과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은 열사의 작은 가슴을 충동질했다. "나는 군대 생활과 그 이후에 속고, 속임만을 당하고 살아왔다. 도저히 현 정권을 이대로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제대한 후에는 그동안 모아둔 저금을 찾아 덤프트럭을 구입하고 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지역의 농민회와 사회단체에 적극 후원을 하고, 참여할 일이 있으면 함께했다. 아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 얼마의 돈을 지원해 주었던 부친도 "아들이 번 돈을 민주화를 위한 자금으로 정말 값지게 사용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갈망하여 그대 한 몸 불태워 1991년 5월 22일 오후 7시 25분 병원 영안실 옥상에 올라 스스로를 불태웠다.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중환자실에는 이미 박승희, 김철수 열사가 생사를 다투고 있었다. 물을 찾았다. 수액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고 있어도, 온몸의 통증보다 갈증의 고통이 더 심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부모님과 가족들은 안타까운 모습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 호흡이 가빠지면서 열사는 "부모님이 보고 싶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께 "불효해서 미안합니다."는 말을 전하면서 민주투쟁을 부탁했다. 같은 시각, 열사의 고향 보성에서는 '민주학생 김철수 군과 애국청년 정상순 정신계승 및 노태우 정권 규탄 보성군민 결의대회'가 500여 명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 보성역 광장에서 열렸다. 열사는 병상 투혼 내내 흔들리거나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9일 오후 8시 45분, 7일간의 긴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가족들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이 땅의 소풍을 끝냈다.
1991년 6월 4일 정상순 열사 민주국민장 리플릿
강경대·박승희·윤용하·이정순 열사 잠든 망월동 묘역으로 장례식은 6월 3일 열렸다. 장례집행위원장 김병균 목사의 피끓는 설교와 이형일 농민회장의 추모사는 시민들의 눈물샘을 터뜨리고, 가슴을 치게 했다. 발인 후 열사가 광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순을 거쳐 벌교와 보성으로 향했다. 6월 4일 보성역전에서 '애국청년 고 정상순 열사 민주국민장'이 기독교 예식으로 진행되었다. 식을 마친 긴 행렬은 비통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가 아끼고 몸을 태웠던 혁명의 도시 빛고을 광주를 향했다. 행렬은 밤 11시가 넘어 어둠을 뚫고 5.18 피의 격전지 시가지를 지나 광주민중항쟁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 그리고 1991년 봄의 강경대, 박승희, 윤용하, 이정순 열사가 먼저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에 이르렀다.
저자 : 이동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