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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균 - ‘전태일 형’ 부르고 싶었던 영균이... 스무살로 남았다
슬픔도 허락되지 않았던 91년 5월 김영균은 1971년생, 서울 대원고를 다녔다. 그곳에서 교육 민주화를 위한 학생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했다. 1990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입학 후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학내 교지편집위원회 활동을 했다. 8월에는 조국통일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에 참가했고 농활에 참여했다. 1991년에는 민속학과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4월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총장실 단식 농성에 함께 했다. 5월 1일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집회에 앞선 12시 30분경,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라 외치며 안동대 교정에서 분신했다. 안동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다음 날 저녁 8시 13분 경북대병원에서 유언도 없이 생을 마쳤다. 추모집에 실린 스무 살 청년의 약력은 간단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재학 시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출근이 교문에서 막히자 서명을 주도하고 철야농성에 동참하며 졸업식장에서 리본을 나눠주고 참교육을 외쳤다는 건 제자의 영정 앞에 선 은사의 처절한 회고사 내용이었다. 전태일 열사를 형이라 부르고 싶다던 김영균은 “나의 생활이 너무도 평화롭기에 행여 당신의 존재를 망각할 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라는 글을 모란공원 참배 후기로 남겼다.
노태우 정권의 공작과 폭력은 이번에도... 1991년 5월 2일, 김영균이 운명하자 경찰들이 영안실을 치고 들어와 시신을 빼내 갈 것이라는 소식이 여러 통로로 전해졌다. 6월 10일 안동 시내에서 열린 '6.10 대회 및 열사정신 계승대회'에 참가했던 김영균의 선배가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잠을 못 자고 맞아가며 22일 동안 분신의 배후를 조사받았다. 말이 조사이지 분신 배후의 강요였고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수십 명 잡아넣을 조직사건을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분신의 배후가 되기를 끝내 거부했고 생각대로 그림을 맞추지 못한 수사 당국은 엄포처럼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를 안동대학교에서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군에 간 친구들, 방학에 집에 갔던 친구들 20여 명이 줄줄이 기무사로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나머지 학생들은 수배 명단에 올라 잡혀 징역을 살거나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경계해야 할 건 망각 91년 분신정국을 두고 일부는 패배한 투쟁이라고 한다. 87년 6월항쟁 승리의 역사와 대비된 평가다. 그러나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다. 87년 6월항쟁이 오롯이 성공한 투쟁이라면 노태우 군부독재의 광폭한 공안탄압도 없었을 것이고, 강경대가 곤봉에 맞아 죽는 일도, 많은 청춘들이 제 몸 불살라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해서 87년 6월항쟁은 승리의 역사, 91년 투쟁은 패배한 투쟁이라는 도식은 옳지 않다. 또 죽음들이 여전히 분신 배후, 어둠의 세력, 죽음의 굿판으로 매도되어 기록된 역사는 다시 조명해야 할 과제이지, 패배의 기억으로 남겨 둘 일도 아니다. 영균이 죽음에 분신 배후를 만들려는 음모와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 조작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진 적도 없다. 91년 11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대척점과 민주주의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때 나쁜 짓 했던 사람들이 아직 권력자로 행세하는 세상. 분신 정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역사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쳐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죽어가면서 외쳤던 세상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건 패배의 곱씹음이 아니라 망각이다. 91년이 단지 패배한 투쟁이었다면, 세월호 진실 규명 앞에서, 2017년 겨울 광화문에서 딸아이를 앞세워 적폐청산을 외치는 힘과 용기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영균이가 섰던 자리. 30년을 넘어 우리들이 그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는 건, 1991년의 삶이 누구보다 치열했고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 : 안호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