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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한열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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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잠든 민주주의를 흔들어 깨우는 호루라기처럼
1991년 5월 투쟁은 4월 26일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6월 29일 명동성당의 농성을 끝내기까지 약 두 달간의 민주화 투쟁이다. 이 기간에 13명의 목숨이 희생되었으며 전국에 2,361번의 집회가 열렸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이진희, 석광수 님이다. 손석용과 양용찬은 그해 8월과 11월에 돌아가셨다. 하루걸러 한 번씩 들려오는 분신 소식에 온 국민은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1987년 유월 항쟁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취해있었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야당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는 곧 본성을 드러내며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민주세력을 짓밟았다. 1989년 4월에는 ‘좌익폭력 세력 척결을 위한 공안합수부’가 만들어졌다. 공안합수부란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가 안기부 주도 아래 모인 조직이었다. 그리하여 5공 때보다 많은 양심수를 더 오래 가두었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이에 학생과 민중은 온몸으로 저항했다. 분신은 힘없는 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저항의 몸짓이다. 자살이라고 하지만 이는 강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가의 폭력과 시대 분위기가 그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한국판 뒤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을 시작으로 검찰과 언론, 일부 지식인들은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운동권 좌경, 용공, 폭도를 넘어 반인륜적인 집단으로 몰고 갔다. 신문과 방송을 이용한 이데올로기 폭력의 총공세 속에서 91년 5월 투쟁은 막을 내렸다. 치유하기 힘든 상흔과 패배감을 남긴 이 투쟁을 우리는 기억 저편으로 밀어냈다. 91년 5월 투쟁 30주기를 맞아 그해 봄을 복기한다. 상황에 압도되어 제대로 예의를 갖춰 애도하지 못했던 열사들을 다시 모셨다. 강영민, 서은애, 전강희, 정택용, 허윤희 작가가 함께했다. 민주주의란 어느 한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우며 만들어가야 함을 깨우친다. 91년 봄의 희생과 투쟁은 잠든 민주주의를 흔들어 깨웠다. 오늘도 호루라기 소리처럼 우리를 일깨운다.
2021년 9월 문영미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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