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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소식

제2회 이한열 학술제 후기입니다.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11-14 11:20:48 조회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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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보다는 적은 인원이 참석했으나, 비교적 내실있고 재미있게 진행했습니다.
조국사건을 예시로 들면서 청년세대와 86세대와의 거리감을 제시한 임미리 교수님의 발제도 좋았고, 새로운 기법으로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해서 논의한 이원재 카이스트 교수님(연대 사회 90) 의 발제도 흥미로왔습니다.

토론자였던 이기훈 교수님(연세대 사학과)께서 임미리 교수님의 발제 중 아쉬운 부분을 제기하셨습니다. 민달팽이 유니온의 권지웅 이사가 젊은 세대의 입장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했던 점도 구성의 묘미 였습니다.

경영대 학장님과 교수님, 학생들이 끝까지 참석하고 토론도 참여하여 좋았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학술제의 질에 비해 참석 인원이 적었던 점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년에는 좀 더 신경써야 할 것 같습니다. 민동 한동건 회장님의 축사와 함께 민동의 참여도 공식화 되었고, 내년부터는 내용에 관해서도 발제를 담당하는 형식 등으로 함께 준비하고 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나고 시간을 내는 것이 가능한 임미리 님, 권지웅 님과 뒷풀이를 했습니다. 1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잘 마쳤습니다. 사진도 올립니다.

- 감사 김익태
- 저자의 동의를 얻어 공개가 가능한 글은 공개하겠습니다.

 

 

 

 

 

 

 

다음은 권지웅 님의 토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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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새로운 세대가 아닌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 권지웅

어떤 표현과 상황이 적절할지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정치 권력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86세대의 슬픔과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나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86세대와 지금의 청년 세대가 서로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각기의 슬픔은 꽤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 공감되는 것과 그것이 자신의 슬픔이 되는 것은 다르다.

그 슬픔의 주체가 정치 권력 가까이 있는 사람 혹은 집단이라면 그(들)의 슬픔은 공공자원의 배분 기준이 된다. 나는 이를 정치에 속한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치의 슬픔이 된다는 건 공공자원 분배의 우선순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정치 밖의 슬픔도 있다. 예를 들면 구의역 고 김군의 죽음, 조국 장관을 둘러싼 광화문과 서초동 어디에서도 끼지 못한 채 덩그러니 홀로 입시과정을 준비했을 수많은 청년들의 슬픔 등이 그렇다.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공감하는가와 상관없이 슬픔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정치 밖의 슬픔이다.

올해 초 서울시는 '청년출발자산'이라는 정책을 내부 검토했다. 부모로부터 자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다수의 청년에게 정부가 출발선의 격차를 줄여주자는 취지의 정책이었다. 저소득 가구의 청년에게 1300만 원 가량의 자산을 주고 필요할 때 인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책의 개요였다. 이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이 상속·증여세를 청년에게 주자는 청년기본자산 논의와도 비슷하다. 서울시는 논의 끝에 '청년출발자산' 정책을 결국 채택하지 못했다.

그 결정이 날 때쯤은 조국 장관 임명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정치의 에너지는 오직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회'에 있는 듯했다. 문득 구의역 고(故) 김군의 사고가 난 후 토론회에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당시 김군 친구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군이 입사한 ‘은성 PDS’는 김군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돌던 회사였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그 회사가 위험해 가지 않았고 아마도 김군도 이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곳에서 김군은 월급을 모아 대학을 가려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김군은 자신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 곳에 갔었던 것이고 동시에 그는 대학에 가고 싶어 그 돈을 모으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성인이 되는 그에게 정부가 1300만 원의 자산을 지원한다는 제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어쩌면 그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크게 다치거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위험한 곳은 피하지 않았을까. 설사 그곳에 다니다가도 그 위험을 보고 위험해서 못 가겠어요 하고 그만둘 수 있진 않았을까. 그러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죽는다. 지하철 문에 끼여 죽고, 컨베이어 벨트에 찢겨 죽는다. 며칠 전엔 한 청년이 환풍구에서 죽었다. 그는 그날이 생일이라고 했고 그의 둘째 아들이 98일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슷하게 사람들이 떠난다. 현장실습생으로 일을 하다 떠나고 드라마를 찍다 떠난다. 반도체를 만들다가도 떠난다. 인간에게 가장 극단적인 단절이 너무 쉽게 용인된다.

이렇게 떠난 이들을, 이렇게 쉽게 나열해도 되는지, 이렇게 함부로 용인해도 되는지 미안하고 슬프다. 다음 세대에겐 이 무심한 슬픔을 그만 물려주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 수많은 슬픔이 산재하지만

능력주의 프레임, 성장과 경쟁의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시민과 시민 사이에 커지는 불평등과 다수화된 비참함을 쉽게 용인해버린다. 절차적 공정과 그에 따른 차별적 분배가 누적되어 만들어온 지금의 사회는 소수에게 공정하고 평등할지라도 다수에겐 공정하지도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주택을 보면 지난 2년 사이 서울 중위가격 아파트 가격이 2억 4000만 원이 올라 8억7000만 원이 되었다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 8.7억.. 또 ‘역대 최고’ 경신. 19.10.02 머니투데이
. 29세 이하의 청년의 80%는 첫 월급이 200만 원 미만 ‘첫 직장서 월 150만원 미만’ 저임금 청년 노동자 크게 줄었다. 19.07.16 경향신문
이다. 이 소득으로 서울 중위 가격 아파트를 사는데 398년 200만원 소득을 가진 가구의 저축가능액(흑자액)을 유추하기 위해 <2016년 소득10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 자료중 소득 1,910,654만원인 2분위 흑자율(9.1%)을 활용.
정도가 걸린다. ‘왜 서울에 굳이 살려고 하나’거나 혹은 ‘아파트 말고 빌라는 싸다’는 이야기는 개인적 위로일진 몰라도 공정과 기회의 평등에 다다르지 못한 사회의 실패를 가리진 못한다. 시민 사이의 그 아득한 격차에 짓눌리고 밀려서 그만 떠나버리고 만다. 성장하려면,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 라는 말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해버리진 않았나.

한국 사회는 국가로부터 혹은 국가 권력을 쥔 집단으로부터 시민을 돌보고 연대하는 힘을 구축해왔다. 그 힘은 여전히 값지고 소중하다. 최근의 홍콩사태를 보면서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시민과 시민 사이를 가르는 불평등을 이겨내는 연대로 이어지진 않았다. 국가 혹은 국가 권력을 쥔 집단으로부터 시민을 돌보고 지켜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힘이 시민 사이를 가르는 불평등과 그 다수화된 비참함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지금 그 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현실의 책임이 86세대에게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특정 세대가 자라면서 지금의 기준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특정 세대 전체의 책임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능력주의 프레임, 경쟁과 성장의 프레임은 굳이 연령으로 치자면 전 연령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되려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기준을 만들 시민, 시민집단을 어떻게 키워내고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공동의 경험을 필요로 하고 그것으로 공동의 경험을 구축한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세대’가 된다. 각기 형성한 공동의 경험이 다르기에 각 세대가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다르다.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시작점으로 다음 세대로의 이전은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시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세대 이전은 최종적 접근이 아니라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풀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과 집단을 어떻게 키워내고 찾아낼 것인가에 있다. 우리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다수를 불행하게 하는 기준을 바꿀 집단을 어떻게 키워내고 찾아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정치에 초대할 것인가이다.

능력주의 세계관, 경쟁과 성장의 세계관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시민 사이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이겨낼 연대와 힘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이것이 86세대와 지금의 청년 세대가 마주한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가 만나야 할 지점은 이 해결의 머리 맞댐이 아닌가.

며칠 전 “밀레니얼 86시대를 전복하라”라는 제목의 행사를 보았다. 세대 이전을 중요한 변화의 내용으로 여기더라도 한 겹이 더 필요하다. “( ) 밀레니얼 세대여 ( ) 86시대를 전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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