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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한테는 할 말 없어요, 진보진영이 문제"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0-09-15 00:00:00 조회 : 2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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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한테는 할 말 없어요, 진보진영이 문제"
[인터뷰]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10.09.14 18:03 ㅣ최종 업데이트 10.09.14 18:30 신정임 (laborworld)

배은심, 이한열, 유가협 회장


어머니 , 이 단어를 발음할 때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부터다. 출산 후 2년이 다 되도록 내 옷은 딱 한 벌 샀지만, 아이의 옷은 막 사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다고 사준 건 몇 벌 안 되지만…. 사실 육아의 거의 대부분을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정어머니께 맡기는 불성실한 엄마가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내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였을 게다. 우연히 한 홈페이지에서 이한열 열사의 생일이 8월 29일로 적혀 있던 걸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이유가. 1987년 6월 9일,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지 않았다면 이 열사는 올해 마흔 다섯 살이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배은심(71)씨에겐 지난 23년간 이한열은 대학교 2학년생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생일상을 차려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얼치기 엄마가 8월 29일을 2주 앞두고 배은심 어머니를 만났다.


아들의 생일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미역국 끓이고 팥 넣어 생일떡을 맛있게 만들던 어머니는 이 열사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은 케이크를 사들고 묘를 찾기도 했다. 지금은 서울, 광주, 부산 등 전국을 누비다 보면 생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버리는 때도 있다고 한다.



지난 23년 간, 배은심은 이한열의 어머니 에서 시대의 어머니 로 살아왔다. 아들이 저항한 세상을 알기 위해 집을 떠나 거리로 나왔던 배은심 어머니는 여전히 저항거리 투성이인 세상 거리를 집삼아 살고 있었다.


"어디든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가는 거지"





▲ " 한울삶 은 한울타리에서 같이 살자는 뜻이에요. 저기 영정 속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산다는 생각으로 살지."
ⓒ 노동세상 배은심




배은심 어머니를 만난 곳은 그의 또 다른 집인 한울삶 에서였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사무실이기도 한 한울삶 은 서울 동대문역 뒤편에 자리 잡은 작은 한옥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 대신, 바로 방과 마루 구분이 모호한 한덩어리의 실내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공간 빼곡하게 채워진 열사들의 영정이 손님들을 맞는다.



" 한울삶 은 한울타리에서 같이 살자는 뜻이에요. 저기 영정 속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산다는 생각으로 살지."



영정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기자들에게 배은심 어머니는 그들과 함께 사는 일상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진 속 눈동자들이 말을 하는 것 같아요. 그 눈동자들을 따라서 살아왔지. 어딜 가더라도 나 혼자 간다가 아니라 둘이 가는 거지."



그에게 지난 23년간은 그가 곧 이한열인 세월이었다. 또한 열사들과 함께 걸어온 시간이었다. 2007년부터 다시 유가협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배은심 어머니는 회장어머니 로 불린다.그는 어떻게 유가협과 인연을 맺었을까.



"한열이가 저렇게 됐을 때는 나 혼자만 있는 줄 알았어요. 우리 한열이 묻은 날이 87년 7월9일인데 유가협 창립일이 그 1년 전인 86년 8월 12일이야. 한열이 묻고 만날 무덤에만 가니까 누가 유가협 창립 1주기 행사를 서울에서 한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었지. 그때는 이런 영정들도 없었어요. 어머니들만 있고…. 그렇게 서울을 왔다갔다하면서 활동하게 됐어요."



어머니는 우리 한열이 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전국에서 온 어머니들의 다른 자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기서는 자식 얘기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100명도 넘는 사람들인데 똑같은 사안이 없다는 사실에도 놀랐다고.



"뒤에 서겠다"던 한열이가 왜 앞에 섰는지 알고 싶었어





▲ "우리 한열이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전국에서 모인 어머니들 얘기 들으니 여기선 자식 얘기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 노동세상 배은심




"한열이가 3녀 2남 중 장남이야. 그 때, 고3이었던 막둥이 훈열이가 영정을 들고 다녔지. 그런데 훈열이가 고3 올라가고 얼마 안 되어 한열이가 동생한테 편지를 썼더라고."



그 편지에서 대학생 이한열은 고3 동생에게 "대학 가고 성숙해지면 알겠지만, 공부하느라 바쁘더라도 신문 사설 많이 읽어라. 안 읽으면 붕어가 눈 끔벅끔벅하는 것처럼 된다"고 썼단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보고 붕어 눈을 다시 봤다고 했다.



"모르면 바보 된다는 뜻이더라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만 했던 한열이가 대학 가서 세상을 보니까 깨달은 게 많았나봐."



광주 출신인 이한열 열사가 중학교 2학년 때 80년 광주항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그에겐 공부해서 시험 잘 치르겠다는 게 유일한 관심사였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과 비디오를 본 그는 같은 지역 시민들의 처참한 죽음에 치를 떨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런 글을 남겼다.



"나의 어린 날의 추억, 광주사태가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친구들과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있을 뿐,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유고 <1987년 분단42년 피맺힌 2월> 중에서)



깨달음은 행동을 낳는 법. 서울 신촌 연세대에 다니던 이한열은 당시 인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셋째 누나와 함께 자취를 했다. 87년은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에 맞선 집회·시위가 들끓었던 해, 자취집에 들어온 한열의 몸에선 최루가스 냄새가 나곤 했다. 한열은 누나에게 불심검문 당할 때의 요령 등을 알려주기도 했다.



누나에게서 한열이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TV에 서울에서 데모가 있었다는 뉴스만 나오면 자취집 주인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선 매번 "한열아, 남자가 안 하면 창피할테니까 하더라도 뒤에 서라, 뒤에 서"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주인집 아줌마네로 전화해서 만날 그런 얘기를 하니까 하루는 한열이가 그러대요. 아따, 엄마는 아들을 못 믿소. 아들을 믿으소 라고. 그래 내가 내 아들 믿지. 누가 믿겠냐 고 했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엄마한테 거짓말한 거잖아. 뒤에 선다고 해놓고선 왜 앞에 가 서있었느냔 말이야. 그 이유를 알아야 해서 서울로 많이 다녔어요."



철모 속에서 눈물 흘리던 또 다른 자식들도 안타까워





▲ 집과 유가협 사무실에 걸려 있어서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매일 본다는 배은심 어머니는 "아들을 본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못 본 걸로 치면 수백, 수천 년은 된 것 같은 " 마음으로 지난 23년간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 노동세상 배은심




어머니는 몸소 집회현장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선 시위에서 앞에 서는 사람들이 사수대란 사실도 알았다.



"뒤에 지나가다 다친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하다 그렇게 됐구나, 하고 깨달았지. 뭔가 뜻이 있어서 앞에서 있다 그렇게 됐지. 놀다가 다친 게 아니라고…. 그걸 알고부터는 한열이가 평균보다 큰 편이었는데 좀만 작았으면… , 좀 덜 멀끔하게 생겨서 눈에 안 띄었다면… 최루탄이 머리에 맞아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연세대를 시도 때도 없이 다녔던 당시는 6월항쟁이 끝나고 7, 8, 9노동자대투쟁이 한창이었다. 어머니는 연세대 노천을 빽빽하게 가득 메운 노동자들을 보면서도 생각했다.



"진작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뭉쳤으면 우리 한열이가 안 죽어도 됐을 텐데…."



그렇게 하나가 되길 바라면서 어머니는 시위가 벌어지는 거리 위에 함께 서 있었다. 아들이 그랬듯 어머니도 시위현장 맨 앞자리에 있곤 했다. 두렵지 않았을까.



"겁은 안 나요. 내 아들도 그랬는데…. 때론 대치하고 있는 전경들 보면서 가슴 아플 때도 있어. 사실 시국 탓이지 전경들 탓이 아니잖아요. 미운 건 정치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하면서까지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 말이야. 집회에서 경찰에 연행되면 그렇게 따졌어. 사람들 죽어서까지 정치하는 게 재미가 있냐? 불쌍한 자식들만 앞에 세우지 말고 정치인, 형사들이 앞에 서라고 ."



어머니는 최루탄이 아직 시위진압용으로 쓰이던 시절, 최루탄을 쏜 후 어머니 이쪽(전경들)으로 오세요. 이쪽이요. 여기가 덜 매워요 라면서 자신을 부르던 전경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꼭 철모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



자식 명예회복 위해 422일 농성해





▲ "계속 기억해달란 건 엄마 욕심이지.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 잊히면 다행인데 사람들 마음만 무뎌져서 잊히는 건 안타까워"
ⓒ 노동세상 배은심



아들이 죽고 거리로 나선 어머니에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른 모든 유가족 부모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바로 민족민주운동 과정에서 죽어간 자식들의 명예를 찾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벽에 걸린 영정들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은 죄가 없어요. 국가 전복하려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아니야. 광주 5·18이 사태가 아니라 항쟁이었단 진실을 접하면서 독재를 거부하고, 부정적인 걸 부정적이라고 말하다가 죽은 사람들일뿐이지. 그런데 그 전 정부에서 어떻게 왜곡했어요? 애인 문제로, 가정형편 때문에 죽은 범법자로 만들어 놨잖아요. 내가 보기에 저들은 천사예요. 욕심 부리지 않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천사가 따로 있나. 저들에게서 범법자 낙인을 벗겨줘야 겠다는 마음에서 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말로 하면 또 금방 번복할 수 있으니까 법을 만들자 했지."



유가협은 1998년 11월 4일부터 국회 앞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특별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의 국회통과를 위해 농성에 들어갔다. 그 해 12월 국회에서 끝나길 바라고 시작했던 농성이 422일이나 이어졌다.



"여름에 기온이 30도면 아스팔트 위에 세운 농성장의 체감온도는 40도가 넘었지. 또 겨울에는 얼마나 추웠게. 그런 데서 단식도 했어요."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집념이 두 특별법의 국회통과를 이루어낸 게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보상으로 쏠렸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보상은 염두에도 안 뒀어요. 사람 죽여 놓고선 그걸 돈 몇 푼으로 어떻게 책정할 수 있겠어. 우린 그걸 접수 못하지. 그냥 법을 만들다 보니까 그런 것도 해야 돼서 한 거예요. 우리가 원한 건 민주공원이야."



민족민주열사들은 마석 모란공원, 5·18구묘역, 부산 솔밭산묘역 등으로 흩어져 안장돼 있다. 87년 이전에는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고, 관이 개입돼 가족 선산이나 일반 공원묘지에도 묻혔다.



"4·19국립묘지처럼 우리 아이들도 명예회복하고 한 곳에 모아두면 우리가 살아있을 때 못되더라도 나중엔 유공자도 되고 국립묘지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아이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그 죽음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이었다. 정부가 그 마음을 받았을까. 정부는 지금 경기도 이천에 민주공원(묘역)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시종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공원은 접근성과 역사성이 있어야 해요. 근데 지금 이천에 추진하고 있는 건 그중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아요. 정부에서는 3만 평인가를 무상으로 줬다고 하는데 좋은 땅이면 무상으로 줬겠어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긴 가기가 너무 불편하단 말일시. 게다가 악산이에요. 또 역사성이란 것도 사람이 자의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거짓말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지금 민주공원터로 지정된 이천은 경기도지만 서울에서 가기 편한 곳이 아니다. 또 진입로도 없단다. 경사로도 높고, 부지 바로 옆에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 소음도 심하단다. 정부기관은 방음벽이나 방음림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건 민주공원을 더욱 지역과 분리시키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만 묘지에 안장할 수 있게 그 자격을 제한했다. 마석 모란공원, 5·18 구묘역 등에 묻혀있는 많은 의문사 희생자들과 민주화된 90년대 이후 사망한 민족민주운동 열사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어머니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몇몇 유가족분들은 우리 죽기 전에 꾸리자면서 정부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려고 하는데, 나중에 민주성지가 되길 바란다면 그렇게 문제를 풀어 가면 안 된단 말일시."



독재자는 머릿수로 무너뜨리는 것





▲ 살아있다면 지난 8월 29일로 마흔다섯번째 생일을 맞았을 이한열 열사. 그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아들이 최루탄에 맞아 죽은 뒤 23년간을 아들 대신 살아왔다. 웃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어머니는 "유가족이 어떻게 웃냐?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라고 응수했다.
ⓒ 노동세상 배은심




한열이를 묻은 후 어머니는 수많은 장례투쟁을 거쳤다. 운동 과정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이 다 어머니의 자식들이었다. 어머니는 한열이를 묻어놓고 장례투쟁에 참석해 입관, 하관하는 걸 본 것만도 30명이 넘는다고 했다.



"묘지에 가면 여자들은 하관식을 잘 안 본다네. 근데 나는 왜 그게 그렇게 보고 싶은지 몰라. 한열이 땐 눈앞이 캄캄해서 뚜껑을 덮었는지 뭘 했는지도 몰랐는데 그래서 그런가. 묘지에 가면 입관할 때 아저씨들이 노자를 놔야죠 하는 말이 귀에 탁 들어오는 거야. 이 애들은 시위를 오후에 하면 점심도 안 먹고 나간다는데, 죽어갈 때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 가다가 뭐 사 먹어 그러면서 주머니에 있던 만 원짜리를 꺼내 가슴 위에 올려다 놓지."



어머니는 운동에서의 죽음은 내 아들의 죽음과 똑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지금도 남보다 수백 배 아팠을 어머니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그려진다고. 그 마음을 알기에 어머니는 2009년 1월 용산 참사소식을 듣고선 한걸음에 현장으로 달려갔고,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았다.



유가협 블로그에선 어머니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어머니는 독재 권력과 그 권력이 자행하는 폭압행위를 정말정말로 징글맞도록 싫어하십니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 폭압행위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절망하시다가도 그 현장에 달려가서 투쟁에 동참하십니다. 낮과 밤, 새벽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실천하십니다."



이명박 정부에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 같아 물었다. "이명박한테는 할 얘기 없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보다는 우리 진보진영에게 말하고 싶어요. 진보진영이 이명박이 하는 것만큼 대응을 못하는 것 같아. 촛불 때처럼 이명박을 공격하면 지금처럼 막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때 이명박이 청와대 뒷산에 가서 아침이슬도 불렀다고 했거든. 많은 머릿수를 모으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지. 요즘은 집회보다 기자회견이 많대. 그런 기자회견으로 모든 게 소통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잖아. 고상하게 기자회견 해갖고는 저 독재자들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옛날에 우리들이 독재자를 어떻게 무너뜨렸나. 빈주먹으로, 머릿수로 무너뜨린 것 아닌가."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절절한 엄마 마음



이한열 열사가 다닌 연세대가 있는 서울 신촌거리 한 골목에 이한열 기념관이 있다. 농협에 다녔던 이 열사 아버님이 정년퇴직 후 받은 퇴직금을 다 쏟아 부어 만든 곳이다. 현관에서 제일 잘 보이는 타일 위에 어머니가 직접 쓴 글귀가 방문객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장하다. 미운 오리새끼/ 이럴 수가. 있느냐/ 이 한 열/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엄 마 가



어머니는 23년 전,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고 무너졌다. 87년 7월 9일, 사람들에게 늘 자랑하던 큰아들을 망월동에 묻고선 아침이면 18개월 된 외손녀를 데리고 아들 묘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5·18구묘역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잡초가 사람 키만큼 차올랐던 험한 길이었다. 하루 종일 굶은 채 세상을 떠난 한열이 곁을 지키던 어머니는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내려오길 반복했다.



한열이를 알기 위해 서울 시위현장을 쫓아다니다 광주로 돌아와도 꼭 한열이 곁으로 갔다. 집에 먼저 들렀다가도 망월동에 갔다 와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있으면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23년이 지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하다. 7월 5일은 이한열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어머니는 매년 그날 추모제를 연다. 올해도 7월 5일에 망월동에서 추모제를 했다. 추모제 2주 후쯤 어머니는 서울에서 회의를 하다가 추모제 때 놨던 꽃 등을 치우지 않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1시간도 그 자리에 못 붙어 있는 어머니, 바로 광주로 내려갔단다.



"내려가 보니 진짜로 그대로 있네. 그게 얼마나 속이 상해. 2주가 넘도록 아무도 안 챙겼다는 거잖아요. 세상이 엄청 무뎌졌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꽃 치우고 잡초 난 거 정신없이 가위로 자르다보니까 손가락이 아프더라고. 손을 보니까 물집이 잡혀있는 거라. 그렇게 미치지 않고서는 우린 살 수가 없어."



암울한 현실, 행동 없는 게 안타까워



예전에도 밤에 눈이 오면 어머니는 "우리 한열이 추워서 어쩔까" 하면서 많이 울었단다. 그런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망월동으로 가면 너무 고맙게도 누군가 눈을 치워놓기도 했다. 다시 5·18구묘역에 잡초가 무성해지는 요즘, 그렇게 열사들이 잊히는 게 어머니는 안타깝지 않을까.



"안타깝죠. 하지만 계속 기억해달라는 건 엄마들 욕심인 거죠. 그런데 정말 세상이 좋아져서 잊힌다면 다행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 생각이 무뎌지니까 그게 더 안타까운 거예요."



한열이가 죽고선 가족들에게 "한열이는 말을 못하니까 난 한열이와 살란다"고 말한 뒤, 서울로, 대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족민주운동을 지켰던 어머니다. 어머니가 전하고 싶은 말을 이한열 열사가 남긴 글이 대신한다.



"…무서운 건 그들의 발소리가 아니라/꼭 다문 너의 입과/수갑 채인 두 손과/꽁꽁 얼어붙은 우리의 발바닥/소리 없는 함성은 우리를 가둘 뿐이란 걸/왜 우린 알면서 그냥 있어야 했나./ 왜 우린…."



삶과 죽음에 대한 무섬증이 없는 배은심 어머니는 오늘도 권력이 자행하는 폭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거리 위에 서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9월호(www.laborworld.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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