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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문학상 수상작

2014년 이한열문학상 시부문 - 백지원, <발화점>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5-02-06 00:00:00 조회 : 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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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점

 

 

붉은 머리의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 던졌을 때 나는 유리병 속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었지. 병 안으로 가라앉는 수북한 담뱃재를 보고 있었지. 굵은 실로 뜬 스웨터 아랫단에 뛰노는 털빛 흰 순록을 보고 있었지. 일 년 내내 모닥불을 켜두고 손을 녹이는 먼 북쪽 나라를 생각했었지.

 

가분히 뒤꿈치를 움직이는 그녀. 창살에 기대어 서 말린 옥수수 한 움큼을 뒤로 던진다. 흩어진 낱알들의 궤적에는 어떤 미래도 표시되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내려앉기에 이곳은 너무 낮아. 먹이를 주고 싶은 것은 그녀의 불안. 다만 디딘 곳과의 불화를 보여주기 위해 구두 뒤축은 점점 높고 뾰족해지고 합성수지 바닥에는 매일 새로운 홈이 패는 것이다. 오, 이건 나의 스위트 홈!

 

구멍이 나면 어떻게 하지? 귤피 같은 누런색 바닥을 매만지며 그녀가 말한다. 꼭 당신 얼굴을 쓰다듬는 기분이로군. 뜨겁고 축축한 게. 나는 얼굴을 뒤로 하고 대꾸한다. 씹던 껌이라도 뱉어서 채워놔. 재질로 치면 어차피 같은 거니까. 단물은 끝까지 빼는 거 잊지 말고. 개미가 꼬이는 건 질색이거든. 위엔 종잇당을 덮어둬. 왜 당신 매일 밤마다 쓰는 거 있잖아.

 

그보단 당신 샌들 밑창이 좋겠는데요. 걸을 때마다 병든 수캐 혀 마냥 덜렁거리는 거 영 보기 안 좋았다고요. 잘라서 불에 그슬면 딱 맞는 크기가 될 거예요. 어차피 당신은 별로 나가지도 않잖아요. 우리는 가끔 서로 존댓말을 쓴다. 한쪽이 먼저 개시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 규칙. 그러나 나는 말없이 놀란다. 그녀의 시간 감각에 여전히 여름을 내다보는 것에.

 

붉은 머리의 그녀가 머리맡에 소화기를 두고 이불로 기어들 때 잠깐, 스포트라이트가 반짝였다. 나는 손을 뻗어 표주박을 집어 들었다. 딱 얼굴만 한 크기의 표주박은 표면이 매끈해서 표정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허리를 바닥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잠들 때 등은 얼굴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한 건 혼자 있을 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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